박진용,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반목과 조롱과 고소의 ‘세월’이자 ‘명예훼손’의 시대이다. 얼마전 한 보수논객은 특정 다수인을 종북으로 몰아대다가 실형을 선고받았고, 극우청년들의 게시판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은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유족층, 시체장사를 하는 좌익좀비’라 몰아간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이 한창이고, 이성적인 가치를 몰각한 ‘팩트주의자, ‘개인적 취향의 옹호자‘들은 행동의 일선에서 폭식이라는 엽기적인 애국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는 대한민국 청와대에 의해 같은 죄로 고소당한 일본 일간지 기자에 대하여 ‘국경없는기자회’가 불기소를 촉구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으니 대한민국은 현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한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전용하여 유태인의 열등함, 이기심이 독인인의 고통의 원인이며, 유대인을 박멸하는 논리로 게르만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을 끌여들였다. 1차대전 패전후 독일인들에게는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 했고, 이에 부화뇌동한 지식인들은 주변의 이웃이기도 한 유대인을 대량학살 할 수 있는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을 독일인들만의 ‘특이한 뇌구조’라고 말할 사람들은 없다. 그게 우리의 잠재된 본능이고 그들처럼 ‘일베’는 본능에 충실한 놀이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연혁은 권력에 대한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기에, 인종, 여성, 장애자 등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표현은 애초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려던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를 한계로 헌법이 명시한 명예훼손은 변종 나찌의 부활을 사회공동체의 힘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결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 소송의 증가는 사회적 비경제를 창출하는 면이 있다. 특히 국가 사법권의 총화인 ‘형사법정’에 표현 내용을 세우는 제도는 구시대적이며, 말로 인한 처벌가능성의 대중적 자각은, 표현을 요체로 하는 학문, 언론 출판의 영역에 있어서 소위 ‘자기 검열의 일상화’를 구축할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최근에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피소는 이런 위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고의 집합적 표현 양식인 책은 저자의 본질적 주장 즉, 전체의 맥락으로 읽혀져야 하며, 주장의 근거는 ‘사상의 시장’에서 동종의 사인들 끼리 논박되고 비판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혁명가 염상진이 꽤나 멋지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이 많은 부분 할애되었다고 해서 소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이유이다. 태백산맥은 단순한 허구 이상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작가적 관점이 함축되어 있지만 그 시각은 실정법으로 단죄될 수 없는 부분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수백 개의 자극적인 표제를 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아니 위안부가 일본군의 동지라니 “박유하 교수’제국의 위안부 책 내용 보니…충격 넘어 경악” 이 서적은 현재 출판금지 가처분, 형사상 명예훼손, 또 그 이상의 송사에 휘말린 듯하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여러 서평을 읽어봤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할 고의가 있다는 평가는 그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결론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일본 제국의 성노예로 규정하고 있다. 즉 기술의 관점을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닌 국가와 개인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논의를 방향을 설정했다. 이 관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즉 법학의 틀로 바라볼 때 전제 개념에 해당되는 법적 책임의 주체인 국가를 제국과 혼동했으며, 반사적으로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모집범죄에 대한 방조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점에서 법학자 이재승 교수의 비판은 동종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관점은 학자의 고유한 영역이고, 학문의 방향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고, 현행법에 의할 때 논리적 흠결을 가져온다는 점, 그리고 법적인 관점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형사처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적 관점에 관한 차이는 논쟁을 낳고 논쟁을 통한 상호침투는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관점에 대한 사고의 범주를 확장시키며 전향적이고 진일보한 질서와 원칙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접근방식이 추구하는 소통과 보완의 과정이다.

결국 명예훼손의 주체가 된 제국의 위안부는 상식적 논쟁과 비판을 넘어 바람직하지 않는 사법적 판단의 절차로 이송되었다. 일반적인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법적’으로 이 사건이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인 허위사실의 인식, 비방의 목적을 인정하기 어렵고, 이에 대한 고소는 무리한 소송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행위를 위한 사법권의 사적 전용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게 된다. 고소가 권리남용이 된다면 제고하고자 하는 공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반인의 법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의 ‘조리를 향한 도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논리는 집단명칭에 의한 모욕죄의 부당함을 다투고자 수많은 사람을 고소했던 정치인 출신의 모 변호사의 항변과 닮아있다.

친일의 칠을 덧씌우는 언론의 행태는, 종북의 칠에 익숙한 극우세력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터넷 언론의 ‘자극적 제목 뽑기’라는 선정주의는 학문으로 논쟁하고자 하는 학자를 법정에 세웠으며, 다른 한편으로 피고소인을 수많은 명예훼손과 모욕죄의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명예훼손적 친일 작품이 아니라면 이는 무고죄에 해당 할진데 과연 그는 평등하게 사법적인 구제를 구할 수 있는 지위인가?

부연컨대 무리한 사법의 사용은 결국 사고를 검열하게 만들고 표현을 위축시키게 된다. 또한 주류질서의 경제주의, 이와 결합한 언론의 선정주의, 그리고 ‘대세’로 구분하는 편의주의를 통해 비주류적인 관점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세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조직적 일관성은 다양한 사고와 표현을 공격함으로서 결국 적군과 아군의 논리로만 준별되는 학문적 이분법이라는 퇴행으로 이끌게 되어, 궁극적으로 일체의 다양성이 용인되어야 할 학문질서를 후퇴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법학자들, 법조인들은 이 유죄 추정된 금서에 대한 가벌성과 관련하여 직업적 양심에 의한 어떤 법적평가를 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론의 재판을 통한 유죄평결에 맞서는 정치적 부담을 감당하느니 가만히 있고 싶은 생존 본능이리라
이 점에서 마치 국회의원 이석기의 내란음모사건에서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침묵했던 모습이 교차되기도 한다. 아직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안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