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 <금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하여

정우성

(출처) https://www.facebook.com/woosung.jeong.7/posts/838926126148741

<제국의위안부>라는 책은 이제 한국에서는 읽을 수 없게 됐습니다. 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자는 손해배상책임과 형사고소 이 두 개의 소송이 남았습니다. 긴 싸움이 될 것이며, 수년의 피곤함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수준이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저자인 박유하 선생을 몰랐다가, 독서를 하고 서평을 쓰면서 페북으로 연결되었죠. 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제가 그때 7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을 인정하는 기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저서에 대해 서평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려 7편의 서평을 쓴 까닭은 <제국의위안부>에 담긴 글이 제 사유를 많이 넓혔기 때문입니다. 금서가 된 이 책은 중학교수준의 문장이해력이라면 읽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책입니다(물론 심리적 편향이 문장이해력을 방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매우 묘한 의미랍니다. <자유>에는 사적 본질이 있과 사회적 본질이 있습니다. 사적 본질은 사실상 “나의 양심”과 “나의 의지”에 관한 것인데, 이게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이야기할 때, 예컨대 페북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칼럼나 저술을 하여 주장을 하거나, 거리에서 뭔가를 말할 때의 자유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모두 사회적 차원입니다.

<자유>의 사회적 본질은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의 본질은 <타인의 자유>에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류의 사상가들이 자유를 탐구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자유를 이뤄냈을 때의 그 자유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습니다.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면서 자신의 자유가 확립되는 것이 자유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자유를 외면하는 자유는 없으며, 그런 자유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꼴값을 떠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먼저, <자유>에 대한 저의 생각이 깊게 묻어난 <제국의위안부서평 7>을 소개합니다. 이글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1859년에 출간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영국에서 출간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의 문장을 인용해서 쓴 서평입니다. 2014년 9월 6일에 쓴 글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지요. 인간은 매우 볼품없이 야만적이고 미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게 대부분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인류는 스스로 개선해 왔고 한 번 이룩한 진보는 좀처럼 후퇴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파국은 있으나 더 나은 개선이 없는 한 그 진보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정우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존 스튜어트의 밀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서평 7: http://wp.me/p3Xhl1-lz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으면서 저는 아주 많은 사유의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그중 빛나는 발견 중의 하나가 <과장>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을 <완전한 날조>로 이해해 왔습니다. 만약 그것이 새빨깐 거짓말로 밝혀지는 순간 그런 거짓말은 이제 괜찮습니다. 재판을 받는 거짓말은 그 위험까지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좀처럼 밝혀지지 않고, 양심을 핍박하지 않으며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장하는 거짓말>입니다. 저는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고 <과장하는 거짓말의 존재와 위험>을 깨닫게 됐습니다. 중년이 돼서 알게 된 이 위험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치게 늦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빨리 알게 돼서 기쁩니다. 저는 이것을 주제로 장차 <어린이 철학 강의> 책을 저술할 작정입니다. 서평 2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평 2: http://wp.me/p3Xhl1-kv

몇몇 똑똑한 사람은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별하겠습니다만, 저는 잘 몰라서 그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저만 그럴까 싶어서 주위에 많은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아니?” 제 주위에는 모두 무식한 사람만 있을까요? 모두 몰랐습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수요집회가 열립니다. 우리 회사 앞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정대협 주최로 수요집회가 열리는데 중학생 아이들이 많이 옵니다. 그 학생들에게 정대협의 주장이 각인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렬한 메타포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술형 문장으로 기억하지 않고 메타포(비유)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머릿속 사유체계에 강력한 프레임을 만들죠. 아이들은 자기 나이 또래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생각하면서 증오심을 갖고 돌아갑니다. 얼마나 올바른 일이지 의문입니다만, 그런데 그 아이들이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알까요? 서평 3는 주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서평 3: http://wp.me/p3Xhl1-kF

물론 박유하 선생의 금서 <제국의위안부>는 매우 불편한 책입니다. 우리가 진리처럼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할 뿐더러, 그 이야기가 수많은 “증언”과 “기록”에 의해서 뒷받침되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읽다가 몇몇 단어에 열폭하기도 하죠. 열폭을 부른 단어 때문에 다른 문장, 사실, 문장들의 맥락,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조차 모두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립니다. 그중 상당수가 교수나부랭이들과 <지식인>이죠. 저도 매우 낯선 체험을 했고 또 그런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반대한다고 머뭇거리며 표현했다손 치더라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내가 만난 <와타나베>와 <메이>의 존재는 제국과 전쟁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넓혔습니다.
서평 4: http://wp.me/p3Xhl1-kH

만약 여러분께서 인내심이 있고, 또 지적 호기심이 있다면 여기까지 네 편의 서평을 읽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내심과 지적호기심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진정한 에너지랍니다. 위의 네 가지 서평만으로도 금서 <제국의위안부>가 만만한 책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의 첫번째 서평은 매우 소박했답니다.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함께 병존하는 입장처럼 읽히는군요. 2014. 7. 13.일의 서평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거의 두 달에 걸쳐 서평을 쓴 셈입니다. 엔터테인먼트로 저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한 권의 책을 쓸 적에는 수많은 시간, 수많은 자료,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번뇌가 들어갑니다. 모든 서평에 저자의 그런 노력에 준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만, 제가 첫번째 서평을 쓸 때 들었던 느낌은 ‘이 책, 좉됐다. 승냥이들이 몰려오겠군”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서 <제국의위안부> 는 제국주의를 겨누고 있지만 슬프게도 한국인의 정신세계가 제국주의적이라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약탈과 방화와 침략이 행해지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서평 1: http://wp.me/p3Xhl1-kq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으면서 저의 역사에 대한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 책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이분법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독서의 본질은 사유함에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중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또 40년을 넘게 살면서 듣고 겪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저의 이런 체험은 이 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사유를 확장했습니다. 예컨대 소주를 마시면서 친구와 허튼소리를 할 때, 그러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거나 자기 생각이 정리되었던 체험, 누구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저는 대결함으로써 존재성을 확인하는 80녀대 이후의 진보주의자들의 헤겔철학적인 습성과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그게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진보파들에 만연된 국가주의적 관념이 어떻게 역사에 발현되는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념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죠. 이 서평은 비교적 난해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서평을 끝까지 읽어냈다면 당신의 내 영혼의 친구입니다.
서평 5: http://wp.me/p3Xhl1-kP

여러분, 여러분은 팬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사유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린 아이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스스로를 명망가와 대등하게 생각하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나 지식인이나 정치인,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에, 그렇게 정신세계가 깊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도 여러가지 할 말은 있습니다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기본적으로 “오만”하기 때문이며, 더욱 문제는 그 오만함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엘리뜨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은 있어도 남에 대한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디 한국인의 DNA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문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말을 하려면 귀가 있어야 합니다. 박쥐의 귀가 아니라 사람의 귀, 이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없는 사람의 논쟁은 간단합니다. 이미 쓰기 전에, 이미 말하기 전에 결론이 난 “논쟁”, 그것도 아주아주 민감한 주제에 관한 논쟁 글은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씨발 죽어라 마녀야” 박노자교수와 이재승교수를 반박하고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옹호하는 서평입니다.
서평 6: http://wp.me/p3Xhl1-l7

이렇게 저는, <제국의위안부>에 대해서 7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이제 금서가 됐으니까 책을 들고 저자를 찾아가서 싸인이라도 받아야겠습니다. 보통 파시스트는 한 가지의 정의, 다 하나의 길만을 생각합니다. 대개 그들의 눈빛은 단호합니다. 박유하와 한 하늘 아래 사는 것을 비통하다고 말했던 성남시 시장 이재명 변호사의 눈빛처럼 말이죠. 파시스트는 자기가 위험한 생각에 젖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필연적입니다.

너무나 태평하고 자연스러운 <반일파시즘> 프레임. 관심없습니다. 금서와 금기를 아무리 주장한다 하더라도, 과거가 될 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저는 그저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류의 온유한 공생을 위한 길을 모색할 작정입니다. 더디더라도 그런 지구를 내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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